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켄 덴노 (문단 편집) === 상황 시대 ===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 8월 1일에 고켄 여제는 병든 코묘 황태후를 모시기 위해 오오이 왕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이날 여제에게는 '호지쇼토쿠코켄 황제'(寶字稱德孝謙皇帝), 코묘 황태후에게는 '텐표오신닌쇼 황태후'(天平應眞仁正皇太后)라는 존호가 바쳐졌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도 '후지와라노 에미노 아손'(藤原惠美朝臣)이라는 가바네(姓)와 '오시카츠'(押勝)라는 이름이 주어지면서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라 칭하게 되었다. 정점에 오르게 된 나카마로는 주요 관청 및 관직의 이름을 당풍으로 바꾸는 등 더욱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고켄 여제는 양위한 뒤에도 '덴표호지'라는 연호를 바꾸는 것을 끝내 거절했고, [[준닌 덴노]]의 생부([[토네리 친왕]])와 생모에게 천황과 황후 추봉을 하는 것도 반대했다. 덴표호지 3년(759년), 코묘 황태후가 준닌 천황의 친아버지인 토네리 친왕에게 존호를 줄 것을 제안했는데, 이를 상담하러 온 준닌 천황에게 고켄 상황은 황태후에 대해 사퇴를 아뢰도록 하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황태후의 거듭된 설득으로 토네리 친왕에게 '숭도진경황제'(崇道尽敬皇帝)라는 존호를 주게 되었다. 이는 고켄 여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덴표호지 4년(760년) 7월 16일에 코묘 황태후가 붕어하면서, 고켄 상황과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준닌 천황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8월에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은 오하리다노미야(小治田宮)로 이동했다가 덴표호지 5년(761년)에는 호라노미야(保良宮)로 이동했다. 여기서 병을 얻게 된 고켄 상황은 그 간병을 맡았던 유게씨 출신의 승려 도쿄(道鏡)를 총애하게 되었다. 덴표호지 6년(762년) 5월 23일(양력 6월 23일)에 준닌 천황은 헤이조쿄로 돌아갔지만, 고켄 상황은 헤이조쿄에 돌아가지 않고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이 시점에서 >"고야 천황과 미카도(帝) 사이에 틈이 생겼다." 고 《속일본기》가 말한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사이의 불화가 표면으로 떠올랐다. 6월 3일에 고켄 상황은 5위 이상의 관인을 불러 준닌 천황의 불효를 말하며, 자신은 불문에 들어 별거할 것을 표명하고, 나아가 >"천황은 항례의 제사 같은 사소한 일이나 맡으라. 국가의 대사와 상벌은 짐이 맡을 것이다." 라고 선언해버렸다. 이 불화의 원인으로는 승려 도쿄를 배제하려는 준닌 천황과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움직임, 자신이 쇼무 천황의 적자이자 황통의 정통 계승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고켄 상황이 천황에게 불만을 품게 된 것 등이 거론된다. 덴표호지 7년(763년)부터 8년(764년)까지 도쿄나 기비노 마키비 등의 상황파가 요직을 맡고, 나카마로의 아들들은 군사 요직을 차지하는 등 상황과 천황ㆍ나카마로의 세력 다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